배움과 배움의 꼬리표에 관한 이야기
2025.08.30 21:24
우리는 항상 배움으로부터의 꼬리표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것은 얼마나 배웠는지가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의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걸어온 길을 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재단하는 데 있어 가장 쉽다고 여겨지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개인의 하루하루 희喜와 비悲를 다루는 것은 어려우나, 배움의 꼬리표는 단 몇 줄만으로 십여 년의 세월을 훔쳐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당히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항상 '복잡한 것을 간단히 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것은 효율의 이론에 따른 것이다. 한 사람의 족적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것은 피곤하고 부담되기만 할 뿐 개인에게 있어 득이 되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을 간단히 하기 위해서 효율성에 근거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객전도가 쉬이 발생한다. 그 사람의 역사를 효율적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인간이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을 효율적으로 보고자 하게 되고, 결국은 '그 사람의 역사'가 순식간에 '그 사람' 자체로 바뀌어 버린다.
그래서, 배움은 역설적으로 배우지 못함을 양산한다. 누군가가 걸어온 길을 재단하는 것도 결국에는 '나의 배움'에서 오는 '나의 판단'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권리이고, 불가피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판단'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이다. 경험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동시에 그 판단은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이 그 판단 자체에 내포된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배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틀릴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알리게 되는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이 돈다: "내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 생각에 얽매여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받은' 배움에 매몰되지 않되, '배운' 경험에도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생각'에 끊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배움에는 끝이 없다."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배움이 너무 초라해 보이는가? 초라하지 않다. 너무 어려워 보이는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아주 떳떳한 건가? 그렇지도 않다. 그냥 대충 해도 되는가? 당연히 안 그렇다. 정말로 배움에 있어서 중요한 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배움'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배움의 꼬리표가 이제 어떻게 보이는가. 발목을 옭아맨 채 단단히 묶여있던 배움의 꼬리표가 좀 다르게 보이나. 아니면 그 모습조차 틀린 것 같나. 그게 '배움'의 본질이다. 왜냐면 내가 보는 그 모습조차 결국 '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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